“진넨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건가.” “.......” “진넨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진넨스가 뒤를 확 돌아봤다. 앗, 여보! 모이라를 보는 순간 특유의 애교 섞인 표정이 드러났다. 둘의 만남은 항상 그랬다. 복 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각자의 이유로 희비가 교차하고는 했다. 모이라는 진 넨스가 무리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홀몸도 아닌데, 무거운 짐을 들고 끙끙대는 모습이 괜히 불만스럽게 느껴지고는 했다. 구태여 교수가 처 리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직접 맡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진넨스는 달랐다. 스스로도 판단했을 때 괜찮은 적정선을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모이라에게는 끊어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마지 노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는 모이라가 진넨스에게 다가왔다. “이런 잡일은 대충 학생들에게 맡기라니까.”
“이 정도는 견딜만 해요.”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으으, 또 잔소리.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진넨스. 네가 괜찮더라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 그 박스 이리 내놔. 마침 가는 길도 겹치니 들어줄 테니까. 모이라가 진넨 스의 가방을 확 낚아챘다. 보기에는 가벼운 것 같았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제법 무게감이 느껴져 공연스레 한 마디를 더 얹으려는 순간, 진넨스가 고 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여보, 가는 길이 겹친다니? 나 아직 어디 가는 건 지 얘기 안 했는데.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요?”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아하하, 정말로 내 짐 들고 어디로 갈 건데요?” “어차피 강의실에 가던 중이었잖아.” “으응?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 정도 스케줄도 모를 줄 아는 건가?” 빨리 와. 이러다 늦을 것 같군. 모이라가 보폭을 크게 하며 앞장섰다. 그 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진넨스는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기 시작 했다. 제 아내를 바짝 따라잡은 진넨스가 위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언 제나처럼 평화로운 날이었다. ***
모이라는 짐을 강의실까지 가져다주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진넨스의 상태 를 살폈다. 배를 항상 따뜻하게 해야 한다, 혹시라도 무거운 걸 들면 몸에 무 리가 갈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나를 불러라, 강의 중간에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휴식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져라....... 진넨스는 애정 섞인 잔 소리를 들으며 네에,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무슨 어린 아이도 아니 고. 알아서 잘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진넨스는 모이라의 그런 점이 싫지 않았다. 원래는 아이를 가지 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던 사람이, 진넨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까. 병적일 정도로 효율과 확실함을 추구하던 모이라가 저 때문에 이토록 변해간다는 게 좋았다. 고질적인 성격 탓에 제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지는 못해도,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가 진넨스에게는 사랑으로 느껴졌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애정의 형태다. 이게 사랑이 아니고 다른 감정일 수 없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곧장 모이라가 생각나고는 하는 것이다. 강의를 끝마친 진넨스가 문 앞에서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두꺼운 서류철 과 각종 자료가 담겨 있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 자연스레 밭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윽, 또 아파....... 허리께를 두드리고는 곧장 배에 손을 얹어 그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딸. 너도 엄마가 보고 싶은 거야? 나도 빨리 보고 싶어. 그래도 아직은 더 있어야 해. 제 뱃속에 있는 아이에 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진넨스는 고통을 견뎌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진넨스의 생각은 확고했다. 모이라 와 똑 닮은 딸을 항상 원했지만, 신체적인 고통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 루가 다르게 불러가는 배와 쿡쿡 쓰시는 듯한 통증, 그리고 밤낮 가릴 것 없 이 찾아오는 요통. 만삭인 진넨스가 이 모든 것을 견디며 교수로서의 직책 을 완벽히 해내는 건 가히 대단할 정도였다. 모이라는 진넨스에게 많이 힘들 테니 학교 일을 잠시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녀는 할 수 있는 선까지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 으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를 쓸어만지며 미래의 아이를 생각하 는 것이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 어떤 진통제보다 잘 듣는 위로였던 것이 다. 그렇게 벽에 머리를 기대고 밭은 숨을 내뱉던 진넨스에게, 모이라가 빠 르게 달려왔다.
“잠깐, 진넨스!” “으앗, 깜짝이야!” “지금 괜찮은 건가?”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진통이 심해진 것 같은데, 어서.......” “응? 아하하.” 모이라의 다급한 말을 진넨스의 작은 웃음 소리가 잘라먹었다. 여보, 그 런 거 아니에요. 그냥 허리랑 배가 좀 아파서 쉬고 있던 건데. 모이라의 눈썹 이 일순 위를 향했다. 당황스러움과 안도감이 묘하게 섞인 표정이었다. 작 게 한숨을 내쉰 모이라가 진넨스의 허리를 감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플 때마다 조금씩 쉬어주면 괜찮아지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진넨스, 오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지?” “으응, 그렇긴 한데. 왜?” “조금 더 쉬도록 해. 같이 사무실로 가도록 하지.” 짐은 내가 들어줄 테니까. 짧은 문장을 끝으로 모이라가 진넨스의 가방 을 챙겼다. 모이라의 행동이 오전의 일과 겹쳐 기분 좋은 기시감을 자아냈 다. 온갖 서류철과 각종 강의 자료가 잔뜩 담긴 에코벡을 한쪽 어깨에 맨 뒤, 반대편 손으로는 진넨스의 허리를 감싸 포근히 지탱했다. 그러고는 아까와 비교될 정도의 느릿한 걸음으로 제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데려다주는 것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 더 욱 중요한 게 진넨스였다. 나도 많이 변했군. 모이라가 속으로 제 변화를 생 각하며 진넨스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모이라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진넨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네준 뒤, 제 책상 위에 앉아 연구와 관련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참으로 그녀다 운 행동이었다. 이를 본 진넨스가 퉁명스럽다는 것처럼 볼에 공기를 불어넣 고 투덜거렸다. “기왕 여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나랑 같이 있어야지. 뭐 보고 있어요?”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논문.” “아, 당신이 예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는 그 내용?” “응. 기억하고 있었군.” “당연하죠.” 당신과 관련된 걸 어떻게 잊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전부 다 기 억하지. 모이라는 진넨스와 함께 지내며 이런 애정 표현에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예전 같았으면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낯간지러워 했을 사 람이, 제 아내에게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국 마지 못 하다는 표정으로 책상에서 내려온 모이라는 진넨스가 앉아 있던 소파로 자 리를 옮겼다. 이제 됐지. 진넨스는 언제나 그랬듯, 행복한 웃음을 띄우며 그 녀의 한쪽 손을 잡았다. 좋아요. 맞닿은 살갗에서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 는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곁을 내어준 모이라는 다시금 글을 읽기 시작했 다. 진넨스는 그녀의 옆에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노곤한 말투로 미래 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했다. “.......”
“우리 애는 분명 당신을 많이 닮았을 거야.” “.......” “가장 닮았으면 하는 곳은....... 으음, 역시 눈동자겠지?” 나는 당신의 눈동자가 정말 좋거든.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항상 나를 바 라보고 있으니까요. 뭐, 지금은 혼자 논문이나 보고 있지만 말이야! 아하하, 그래도 역시 당신을 닮으면 좋을 것 같아. 언제나 호기심을 충족하려 애쓰 는 그 눈빛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흐음, 만약 성격이나 취향까지 비슷하면 어떡하지? 당신을 따라서 유전학에 관심을 가진다든가. 물론 어느 쪽이든 사랑해 머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하하, 아무튼. 그 작고 사랑스 러운 손과 발을 만지는 것도 기대가 돼. 정말...... 얼마나 귀여울까. 신생아 는 한 손에 꼭 들어올 정도로 작으니까, 소중히 대해 줘야지. 작아진 당신을 보는 기분일지도 모르겠어. 모이라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그녀의 말을 모두 경청하고 있었다. 진넨스가 제 어깨 위에 머리를 툭 기대자, 모이라는 읽고 있던 논문을 서류 더미 위에 대충 던졌다. 그리고는 진넨스의 어깨에 팔을 감고 배 위를 조심 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평소 타인을 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깨지기 직전의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신중하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모이라였다. “나는 나 자신보다 당신을 더욱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는데 말이야.” “정말? 나랑 완전 반대구나.” “뭐....... 뱃속의 아이가 누굴 닮을지에 대한 걸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네 건강을 항상 우선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어.” “또 그 소리네. 오늘만 몇 번째인지 알고 있어요?” “임신한 아내를 걱정하는 건 통상적으로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당신은 그 정도가 과하다니까. 진넨스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모이라를 바라봤다. 아닌 척 하면서 엄청 걱정해주잖아. 안 그래요? 모이라는 언제나 언제나처럼 냉철한, 그러나 은근히 다정함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 보다도, 지금 졸리지는 않은 건가? 아까부터 눈의 깜빡임이 느릿해졌잖아. “많이 졸리면 푹 자도록 해. 나중에 깨워 줄 테니.” “으응, 그래도 당신이랑 더 얘기하고 싶은데.” 계속 얘기하고 싶다는 말과 달리 노곤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결국 모이라 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모이라는 그런 진넨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어 보였다. 자는 모습조차 토끼 같군. 그러다가 여우에게 잡하먹힐지도 모를 텐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담요를 가져와 진 넨스에게 덮어줬다. 진넨스 또한 아늑한 훈기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잠결 에 작게 웃음을 지었다. 모이라는 읽다 만 논문을 마저 읽으며 그녀의 어깨 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 진넨스가 느릿하게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다. 책상에서 는 따스한 스탠드가 옅은 빛을 자아내며 너무 어둡지 않게 방을 밝히고 있 었다. 천천히 눈을 비비는 순간, 제 옆에 있던 모이라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 다. 으음....... 여보? 아, 다음 강의가 있다고 했었지. 그러고는 어깨에 둘러 진 담요를 살짝 치운 후, 협탁 위에 얹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편지인가? 작은 편지 봉투를 뜯자 그 속에 정갈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진넨스 는 작게 웃으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리아 진넨스에게. 진넨스,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쯤에는 아마 만삭일 테지. 당신은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잠들기 직전까지 아이에 대한 말을 하더군. 뱃속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명이 잠들어 있다는 게 그리도 신기한 모양이야.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당신은 항상 괜찮다며 씩씩하게 굴어도, 그 여린 몸으로 한 생명을 품는다는 건 필시 힘든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고는 하잖아. 그럴 때마다 참으로 고맙더군. 뭐, 당신은 그 아이가 나를 닮기를 바라고 있잖아. 허나 나는 그렇지 않아. 그 작은 생명이 놀라울 정도로 당신을 쏙 빼닮기를 원해. 사랑스러운 눈꼬리 와 밝은 목소리,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당신의 성격. 그 모든 것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중이야. 내가 당신과 만나서 얻게 된 것은 셀 수 없이 많아. 그러나 그 중 하나를 고 르자면 단연 ‘사랑’이라는 감정일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비효율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싫어해. 뭐, 굳이 따지자면 거부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군. 어쨌거나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는 게 진절머리가 나고는 했지.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을 만나고,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 나의 작은 토끼 같은 아리아 진넨스. 당신에게 말이야. 사랑이 라는 불필요한 감정은 나를 흔들어 놓고, 가끔씩은 곤혹에 빠지도록 만들 어. 일을 하다가도 종종 당신의 생각이 나. 예전의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 한 미래겠지만. 나에게 이런 감정을 가르친 당신이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은...... 우리의 미 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날 이끌어준 당신과 함께할 수많은 내일. 그 추상 적인 시간들마저 기대하고 있어. 아리아 진넨스, 진심으로 사랑해. 언제나처럼 내 곁에서 사랑을 이야기해 줘. 나도 언제나처럼 당신과 함께할 테니. 영원히. - 아리아 진넨스를 사랑해 머지 않는 모이라 오디오런 Moira O’Deorain.
마지막 문장을 끝마친 진넨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사랑 받고 있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구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차로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감정 표현에 서툰 아내가 자신 을 위해 노력하는 게 진심으로 느껴져서. 벅차오를 정도로 황홀한 감정을 느끼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진넨스는 모이라가 돌아오면 곧장 대답을 전하 기로 결심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기분 좋 은 설렘이 피어올랐다.